어떤 음악은 뒤늦게 발견된다. 세상에 좋은 음악이 너무 많은 탓이다. 그 음악을 죄다 찾아내거나 듣진 못한 탓이다. 그렇다면 어떤 음악가는 좋은 음악을 내놓았는데 세상이 알아주지 않아 좌절하지 않았을까. 그러다 영영 음악을 접어버린 이들이 여럿인 건 아닐까. 지난해 10월 17일 싱어송라이터 김동규가 발표한 첫 정규 음반 [너의 노래]를 뒤늦게 들으며 생각이 많아졌다. 사실 김동규와는 소셜미디어로 연결되어 있다. 음반을 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는데 정작 음반을 들은 건 최근이다. 내가 이렇게나 엉터리다.
미틈과 원효로 1가 13-25에서 활동하던 김동규의 첫 솔로 앨범에는 그가 오래전에 써둔 곡들과 최근에 쓴 곡들이 섞여 있다. 김동규가 쓰고 원효로 1가 13-25에서 함께 활동한 곽은기가 프로듀싱을 맡은 음반을 들으며 몇 번이나 울컥거렸는지. 타이틀 곡 ‘둘이서’를 처음 들으며 엉엉 울 뻔했고, 이어지는 ‘너의 노래’를 들으면서도 말로 다할 수 없을 만큼 마음이 일렁거렸다. 조동진을 좋아했고, 어떤날과 장필순을 사랑하는 이라면, 김성호와 오태호를 아껴 들었다면 비슷한 느낌을 받지 않을까. 1980년대부터 지금까지 이어진 한국 언더그라운드 팝과 인디 포크 음악을 꾸준히 들어왔던 이라면 음반의 수록곡 8곡 가운데 마음을 움직이는 노래를 최소한 한 곡 이상 만날 것이다.
물론 아닐 수 있다. 이 음반을 듣고 마음을 사로잡힌 건 나 혼자뿐일 수 있다. 단지 내 취향에 맞는 노래이기 때문에, 내가 좋아했던 옛 노래들과 흡사한 부분이 있기 때문에 마음을 빼앗겼을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 늘 음악을 다양하게 듣고 엄격하게 평가하려고 애쓰지만, 나 역시 특정한 취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못한다. 더 사무치는 음악이 있다. 오래 들어왔던 음악들이다. 서른 살이 되기 전의 나를 강타했던 음악들이다. 맨 처음 나에게 음악의 마력을 알려준 음악을 능가하는 음악을 발견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충격 같은 감동의 경험이 계속 음악에 귀 기울이게 만들었다. 취향과 기준의 원형을 만들어준 음악들이다. 오래전부터 좋아했던 음악이나 좋아했던 스타일의 음악 앞에서는 사실 누구도 무한정 냉정해지기 어렵다.
김동규 - 너의 노래
그만큼 김동규의 음반을 듣고 또 듣는 동안 여러 음악가들이 스쳐갔다. 만약 그들이 이 노래를 부른다면 어떻게 불렀을까 상상하며 들었다. 잔잔하고 애수 어린 노래들은 동해역으로, 사려니숲으로, 추억의 시공간으로 데리고 간다. 여섯 곡의 노래와 두 곡의 연주곡은 대부분 맑고 정결한 연주의 기운으로 채워져 있다. 거창한 약속은 없다. 화려한 고백도 없다. “나 오늘처럼 가끔 / 좌표를 잃어도 날 향해 불 밝혀줄래 / 굳어진 마음 오래 따스하도록 / 그저 날 꼭 안아줄래”라고 부탁하는 정도가 바람의 최대치이다. 그 부탁을 김동규는 꾸밈 덜한 목소리로 노래하고 키보드와 나일론 기타 등으로 채운다. 그저 소박하기만 한 음악이 아니다. 그레고리안 찬트가 잘 어울리도록 맑고 투명하게 비우고 조율한 음악이다.센티멘탈한 타이틀 곡 ‘둘이서’에는 고단한 세상에 지친 연인을 보듬으며 훔치는 눈물이 배어 있다. “그대 마음 그곳에 숨겨온 그 아픈 일들을 / 다 알 수 없어서 그저 노래해요”라고 노래하는 마음이 사랑이 아니라면 무어라 말할까. 보사노바 스타일을 가미한 곡은 연민과 포용으로 사랑을 표현하면서 안타까움을 감추지 않는 멜로디를 내세워 뻔하지 않은 노래가 된다.
그런데 김동규는 노스탤지어만 노래하진 않는다. 동해역에서 만난 바다의 평화와 기쁨을 노래한 김동규의 지향과 태도는 음반의 다른 곡들에서 더 많이 드러난다. 순수한 갈망이 거대한 자연의 존재를 통해 채워지는 순간의 환희를 노래할 때, 김동규의 떨리는 목소리는 한 사람의 진심을 온전히 대변한다. ‘너의 노래’에도 ‘동해역’에서 내비친 순수하고 도저한 존재에 대한 갈망이 고결하다. 느린 피아노 연주곡 ‘눈을 감으면’과 보컬 곡 ‘사려니숲’, ‘눈 속의 작은 집’에서 느껴지는 태도는 여일하다. 여백을 충분히 만들고, 건반 연주를 중심으로 다른 연주를 더한 곡들은 내내 기도처럼 들린다. 순수한 노래는 간절하게 선한 마음으로 진실했던 순간을 눈부시게 재현한다. 김동규의 노래가 옛 거장들의 음악과 이어지는 방식이다. 뻔한 노래가 되지 않는 이유이다.
음악이 영혼으로 연결되는 통로임을 보여주는 증거는 아직 많다. 누군가 오래 전에 만들어놓았던 아름다운 음악을 듣고 성장한 음악가는 그 음악의 어법과 정서를 자신의 스타일로 이어나간다. 세상에 사라지는 건 없다. 과거는 끝없는 현재로 이어져 미래를 만들어 간다. 삶이 놀라운 이유이고 신비로운 이유다. 그런 노력들 앞에서 누군가를 닮았을 뿐이라고 단정하거나 폄하하는 건 무례하다. 이 음악을 놓치고 오늘의 음악을 논하는 일이 오만해질까 두렵다. 계속 들어야 할 까닭이다. 음악 앞에 겸손해야 할 근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