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민중의소리에 ‘홍천 엄마의 그림일기’ 글을 연재하면서 홍천 화동리 마을의 이한순 할머니를 인터뷰했다. 당시 90이셨던 할머니는 귀도 잘 들리셨고 담담하게 90년의 살아온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화전을 하고 살았던 이야기, 남편을 10년간 전쟁터에 보낸 이야기, 온갖 노동일을 하면서 아이를 키운 이야기, 당시 화전민들이 쓰던 사투리와 생활상을 자세히 들려주셨다. 강원도에서 산 지 1~2년 되었던 때라 강원도 할머니가 들려주는 옛날이야기가 얼마나 소중했는지... 마치 살아있는 박물관을 만난 느낌이었다. 당시 화전민의 삶은 어땠을까? 드라마 한 장면처럼 상상도 해보면서. 몇 년 후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가족분들에게 책 ‘홍천엄마의 그림일기’를 전해 드렸다. 상을 치르고 며칠 후에 외손자가 나를 찾아와 가족들도 잘 몰랐던 할머니의 이야기를 기록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말씀하시며 눈물을 흘리셨다. 당시 할머니의 이야기를 자세히 듣고 기록해두길 참 다행이라고 두고두고 생각했다. 기회가 된다면 꼭 주변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싶었는데 올해 ‘협동조합 숲속마당’에서 영귀미면 좌운리 할머니, 할아버지 열 분의 이야기를 듣고 책으로 엮어보자는 제안을 해주셨다.
힘껏 살아온 할머니의 뒷모습이 한송이 꽃처럼 보인다. ⓒ필자 제공
홍천 영귀미면 좌운리는 영귀미면 사무소에서 30분 굽이굽이 골짜기를 따라 들어간다. 길이 좋지 않았을 때는 영귀미면까지 버스로 두 시간이 걸렸다고 하고, 버스마저도 없던 시절엔 읍까지 산을 넘어서 걸어 다녔다고 한다. 홍천보다는 횡성과 더 가깝게 교류했고 이 지역을 거점으로 좌운장이 크게 열렸다. 좌운리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수려한 선바위가 있어서 마치 다른 세계로 이동하는 느낌이 든다. ‘좌운’, 구름이 쉬어가는 마을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마을에 들어가면 탁 트인 경관에 상상 속 무릉도원에 도착한 건 아닌가 착각이 들 정도이다.
이곳에서 열 분의 65세~93세 사이의 어르신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듣고 있다. 한 분의 인터뷰를 두 번씩 하는데 첫 번째 보다 두 번째 만났을 때 더 많은 이야기를 하신다. 같이 앨범도 보고 결혼식, 부모님 이야기부터 자식들 이야기, 먹고 살아온 이야기를 하다 보면 시간이 훌쩍 지나 있다. 평생 좌운리에서 살아온 분도 계시고 시집와서 80년을 산 분도 있고 전라도에서 올라와 평생 도시에서 장사하며 살다가 노후 보낼 곳을 찾아 좌운리로 오신 분도 있고... 모든 인생이 천지개벽을 몇 번씩 겪으면서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다. 평화로울 것만 같은 산골 마을도 시대라는 커다란 날줄이 개인의 삶이라는 씨줄과 엮여 각자의 장엄한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영문도 모르게 아버지의 강요로 시집을 왔는데 알고 보니 남편이 폐병이 깊은 사람이었어. 아이 둘 낳고 남편과 시아주버니가 병으로 죽고 혼자 아이 둘 키우면서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았어. 지게 가득 짐을 실으면 누가 잡고 밀어줘야 지게를 다시 지니까 사람을 만날 때까지 지게를 내려놓지 못하고 산을 넘어 다니기도 하고. 큰아들이 열 살쯤 되었을 때부터 같이 지게를 매고 읍에서 양은 냄비 같은 걸 떼다가 좌운장에서 팔고 다른 장에 가서도 팔고... 아들이 병으로 죽었는데 죽기 전에 이야기하더라고... ‘엄마 우리 지게 지고 갯골 넘어 다닌 거 생각나?’ 하고 말이야.”
앨범을 보며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좌운리의 살아있는 박물관, 할머니들 ⓒ필자 제공
인생에서 제일 잘한 일은 아이들 건사를 잘해서 자기 밥벌이는 하면서 살아가게 한 것이라고 말하는 할머니도 계신다. 평생 남편의 폭언과 주사에 시달려 몇 번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자식들만 보며 살아왔다고 한다. 다행히 자녀들이 잘 커 주어서 보상을 받는 느낌이 들지만 마음을 너무 다쳐버린 탓일까. 몸이 많이 아프다.
“뭐 좋고 싫은 게 있어? 그냥 사는 거지” 하는 덤덤한 말씀으로 묵묵히 하루하루 살아온 지난 시대와 시절이 있었다. 각자 다른 경로의 삶과 살아온 자세를 통해 지금의 젊은이에게 전할 말도,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접점을 찾아볼 수도 있지 않을까? 열심히 듣고 열심히 기록하며 10월에 나올 책을 그리고 있다. 오늘도 아름다운 좌운리로 이야기 들으러 출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