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기고] 트럼프 눈치보며 극우폭력에 면죄부 준 노벨평화상

베네수엘라 야당 지도자 마리아 코리나 마차도가 1월 9일(현지시각) 카라카스에서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의 3선 취임식을 하루 앞두고 열린 반대 시위에 참석해 국기를 흔들며 지지자들에게 연설하고 있다. ⓒ뉴시스

누가 봐도 2025년 노벨평화상은 명확한 주인이 있었다. 2년 넘게 이어지는 이스라엘의 잔혹한 집단학살 속의 무너진 병상에서 환자를 돌보던 의사들, 폭격의 잔해 속에서 진실을 전하려다 스러져간 언론인들, 끈질긴 생명력으로 인간의 존엄성을 보여 준 가자지구의 민중들이야말로 ‘평화’라는 이름에 가장 합당한 이들이었다.

프란체스카 알바네제 유엔 특별보고관처럼 국제법의 원칙을 지키며 이스라엘의 전쟁범죄를 고발해 온 양심적인 법률가나, 기후 위기라는 또 다른 형태의 전 지구적 폭력에 맞서다가 이제는 집단학살에 맞서는 가장 열정적 투사가 된 그레타 툰베리 같은 활동가 역시 유력한 후보로 거론되기에 충분했다.

인류의 양심은 이스라엘의 만행과 이에 공모하는 서방 세계의 위선을 지켜보고 있었고, 노벨위원회가 최소한의 양심이라도 가졌다면 그 응답은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2025년 10월,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들려온 소식은 전 세계 많은 이들의 기대를 저버리며 뒤통수를 후려치고 말았다. 수상자는 증오와 폭력, 제국주의적 개입을 옹호해 온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불길한 징조는 일찍부터 나타났다. 인종차별과 여성혐오, 극우적 선동으로 미국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전 세계에 파시즘의 공포를 되살린 도널드 트럼프가 스스로를 노벨평화상 후보라 자처하고 나선 것이다. 이는 블랙 코미디였지만, 현실은 코미디보다 더 엽기적이었다. 특히 가자 집단학살의 주범, 베냐민 네타냐후가 이 막장극의 절정을 만들어냈다.

네타냐후는 트럼프가 이란을 폭격해 중동을 일촉즉발의 전쟁 위기로 몰아넣은 직후, 미국으로 날아가 “트럼프는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친구이며 평화를 가져왔다”며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하는 기괴한 장면을 연출했다. 집단학살의 공범들이 서로를 추켜세우는 이 장면은, 오늘날 세계에서 '평화'라는 가치가 쓰레기통에 처박히는 상징적인 순간이었다.

상식을 가진 대부분의 사람은 이를 기막힌 심정으로 지켜보면서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아무리 노벨평화상이 이미 그 권위를 잃고 빈껍데기가 되었어도, 그런 극단적 자기 부정까지 저지를 것이라고는 차마 상상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결국 노벨위원회는 트럼프에게 직접 상을 주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대안은 기만적인 꼼수에 불과했다.

‘평화와 가장 거리가 먼 사람’ 대신
‘두 번째로 거리가 먼 사람’을 택한 노벨위원회


2025년 노벨평화상은 트럼프의 충실한 협력자이자 베네수엘라의 친미적 극우 정치인, 마리아 코리나 마차도에게 돌아갔다. 노벨위원회는 미국의 눈치를 보며, ‘평화와 가장 거리가 먼 사람’ 대신 ‘두 번째로 거리가 먼 사람’을 선택하는 비겁한 줄타기를 감행했다. 마차도는 수상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가장 먼저 트럼프에게 감사를 표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했다.

그녀는 심지어 트럼프가 베네수엘라 이민자를 탄압하고 추방하는 것까지 지지해 온 라틴아메리카의 극우 네트워크의 핵심 구성원이자, 국제적인 극우 세력과도 교류해 왔으며, 네타냐후의 시온주의 정책도 지지하던 인물이다. 베네수엘라 국영 석유산업의 완전한 민영화를 주장하는 극단적 신자유주의자이기도 하다.

노벨위원회는 “베네수엘라의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권위주의 정권에 맞서 평화적 전환을 위해 노력했다”고 수상을 정당화했다. 물론, 베네수엘라 마두로 정권이 전임자인 우고 차베스의 사회주의적 유산을 상당 부분 뒤집고, 민주주의를 외면하며 정치적 반대파를 탄압하고 공정한 선거를 위협해 온 것은 라틴아메리카의 좌파 정부와 활동가들도 비판해 왔다.

마차도 역시 이러한 과정에서 선거 출마를 금지당하고 체포 위협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가 '평화적 전환'을 위해 노력했다는 노벨위원회의 주장은 사실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마차도가 진정으로 노력하고 일관되게 추구한 것은 바로 미국의 가혹한 경제 제재를 통해 베네수엘라를 고사시키고, 외부의 압력을 통해 정권을 전복시키는 것이었다.

마차도는 직접적으로 ‘군사적 개입’을 요청하는 발언은 교묘하게 피했지만, ‘모든 힘과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는 수사는 워싱턴의 매파들이 즐겨 사용하는 언어와 정확히 일치했다. 이미 미국이 여러 차례 베네수엘라에서 쿠데타를 배후 조종하고 군사적 침공 의도를 드러내 온 상황에서, 이것은 사실상 미국의 군사적 개입을 용인하고 부추기는 것과 다름없었다.

무엇보다 오랫동안 베네수엘라 민중을 극심한 고통으로 몰아넣은 핵심 원인인 미국의 경제 봉쇄와 제재를 지지하고 심지어 강화할 것을 요청해 온 그녀의 행적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미국의 제재는 마두로 정권의 핵심 엘리트들에게는 큰 타격을 주지 못한 채, 식량과 의약품 부족, 고물가, 공공 서비스 붕괴 등으로 평범한 민중에게 큰 고통을 줬다.

더구나 최근 트럼프는 ‘마약과의 전쟁’을 핑계로 카리브해에서 베네수엘라 민간 선박을 몇 차례나 공격하며 군사적 긴장을 최고조로 끌어올리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마차도의 노벨평화상 수상은 트럼프가 감행할지 모를 베네수엘라 침공에 국제적 명분을 실어주고, 그 발판을 마련해주는 ‘측면 지원’의 성격을 띤다.

노벨위원회는 트럼프에게 직접 상을 주는 파국은 피하면서도, 그의 충실한 동맹인 마차도에게 상을 안김으로써 트럼프의 불만을 달래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서 가자 집단학살에 대한 국제 사회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 했다. 2년 넘게 이어진 학살과 서방 세계의 공모는 ‘인권’과 ‘민주주의’를 내세워 온 서방 자유주의 질서의 민낯을 드러냈다.

만약 가자지구 집단학살에 반대하던 인사에게 평화상이 돌아갔다면, 이는 이스라엘과 그 동맹국들에 대한 강력한 기소장이 되었을 것이다. 노벨위원회는 이러한 부담을 피하고, 대신 베네수엘라의 '인권과 민주주의' 문제를 부각시킴으로써, 자신들이 여전히 인권의 수호자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고 싶어 했다.

도널드 트럼프(오른쪽) 미국 대통령과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가 지난달 29일(현지 시간) 백악관 국빈 만찬장에서 공동 기자회견 후 악수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회담 후 가자지구 전쟁 종식 계획에 네타냐후 총리가 동의했으며, 하마스의 동의만 남았다고 밝혔다. ⓒ제공 : 뉴시스

이러한 노벨위원회의 선택은 한국의 극우 세력에게도 큰 선물이 될 수 있다. “좌파가 집권하면 우리도 베네수엘라처럼 된다”는 낡고 저열한 선동을 끝없는 돌림 노래처럼 부르던 자들은 더욱 힘을 얻어 목소리를 높일 것이 명백하다. 이처럼 노벨위원회는 가자 집단학살에 대한 공모와 위선으로 너덜너덜해진 ‘서방 자유주의 질서’의 권위를 되살리려고 한다.

그러나 정반대로, 2025년 노벨평화상은 이 질서가 얼마나 이중적이고 위선적인지를 다시 한번 폭로하며, 그 몰락을 돌이킬 수 없게 만든 또 하나의 결정적 사례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애초에 다이너마이트라는 대량 살상무기를 팔아 번 돈으로 만들어진 노벨평화상은 그 태생부터 한계와 모순을 안고 있었다.

헨리 키신저(미국 국무장관)나 메나햄 베긴(이스라엘 총리) 같은 전쟁 범죄자들에게 상을 주며 강대국의 국제정치 필요와 논리에 충실히 복무해 온 그 부끄러운 역사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 위선과 기만으로 가득 찬 상은 진작에 그 수명을 다했다. 미련 없이 역사의 박물관으로 보내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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