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실 간 횟수까지 묻는 상사
나는 두 번 쓰러졌다
직장지옥 1편
프랑스계 회사 에어리퀴드 코리아에서 '직장 내 괴롭힘'을 당한 피해자는 자신을 괴롭히는 외국인 상사에게 화장실 가는 횟수와 시간까지 문서로 작성해 상사에게 보고해야 했다.
“오늘은 화장실 몇 번 갔나?”
복도에서 만난 외국인 직장 상사가 물었다. 당황하는 것도 잠시, 그는 온몸으로 모멸감을 느꼈다. 화장실을 가고 싶어도 상사의 눈치를 보며 참아야 했다. ‘한국 직원들은 화장실을 참 많이 간다’라는 말을 들을 때면 ‘인종차별’까지 느꼈다. 결국 그는 화장실 가는 횟수와 시간까지 문서로 작성해 상사에게 이메일로 보고해야 했다.
“인터뷰하기 전에 약 먹고 왔어요”
기자가 인사를 건네자, 그는 긴장한 듯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에게 고통스러운 기억을 다시 꺼낸다는 것은, 또 한 번 마음에 상처를 받는 일이었다. 직장 내 괴롭힘 피해자인 이 모(55)씨를 지난 7월 서울 종로구 안국역 인근 카페에서 만났다.
2015년 2월, 이 씨는 ‘전무’ 직급으로 프랑스계 회사 에어리퀴드 코리아에 입사했다. 에어리퀴드 코리아는 프랑스 기업의 한국 자회사로, 반도체 제조에 쓰이는 산업용 가스를 판매하는 회사다.
이 씨는 총 32년의 직장 생활 중 18년을 삼성전자에서 근무했다. 에어리퀴드 코리아의 주요 고객 중 하나가 바로 삼성전자였다. 그가 에어리퀴드 코리아에 입사해 처음 맡게 된 업무는 ‘삼성전자 전략 담당 매니저’였다. 그에게 주어진 일은 삼성전자 고위급 임원들과 교류 지속 및 발굴, 삼성전자와 문제 발생 시 고위층을 통한 우선 해결방안을 도출하는 것이었다.
그는 삼성전자와 에어리퀴드의 관계를 풀기 위해, 자신의 인맥을 총동원해 사람들을 만나 읍소했다. 그는 밑에 조직도 없이 혼자 일했다. 오로지 상사에게 보고하는 체계만 있을 뿐이었다. 업무 시간 구분 없이 주 60시간 이상 일했다.
상사가 폭언 퍼붓는 ‘지옥의 시간’
스트레스로 회의실에서 쓰러져
“6개월 동안 회사는 지옥이었습니다. 회사에 출근하기가 싫었어요.”
직장 내 괴롭힘이 시작된 시점은 입사 후 1년 무렵부터였다. 그동안 함께 일했던 상사가 정년퇴직하자 새로운 상사로 싱가포르인 C 씨가 들어왔다. C 씨는 그에게 면전에서는 물론이고 전화통화로 수시로 폭언을 퍼부었다.
특히 그는 2016년 7월 29일 C 씨와의 통화를 잊을 수 없다고 밝혔다. C 씨는 무려 1시간 30분 간 ‘회사에서 당신을 자르라고 한다’, ‘해고는 못 시키니까 알아서 나가라’ 등의 말을 내뱉었다.
전화 통화 이후 그는 닷새 간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굴욕감을 느꼈어요. 제 발로 회사를 나가게 하기 위해 저를 악랄하게 괴롭혔던 거죠.”
결국 같은 해 8월 4일, 그는 회의실에서 갑자기 가슴 통증을 느낀 후 의식을 잃었다. 함께 있던 동료들이 쓰러진 그에게 심폐소생술을 했고,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이송됐다. 병원에서 정밀 검사를 받았지만 심장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의사는 누적된 스트레스와 정신적인 압박 때문에 실신한 것으로 진단했다.
응급실로 실려간 그에게 인사 상무가 찾아왔다. 이 씨는 서럽게 울며 ‘이 사람 밑에서 도저히 못 있겠다’고 사정했다. 하지만 인사 상무는 이 씨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가 퇴원하자마자 인사 상무는 ‘회사를 나가라’고 했다.
그는 꿋꿋이 자신을 내쫓으려는 회사의 압박을 버텨내려 했다. 그러나 직장 내 괴롭힘으로 인한 스트레스는 그의 몸과 마음을 점차 갉아 먹었다. 결국 지난해 9월 15일, 그는 회사에서 또 한 번 쓰러졌다.
직장 내 신문고인 ‘세이프 콜’은 무용지물
“나는 다 잃었다” 절망하는 피해자
“이놈의 회사 당장 때려치워야지 수없이 생각했지만, 도저히 억울해서 그만둘 수 없었어요.”
그가 다니는 곳은 ‘직장 내 괴롭힘’을 법으로 금지한 프랑스 계 회사였다. 그는 회사에서 구제받을 수 있는 방법부터 찾아봤다. 그러던 중 ‘세이프 콜(Safe Call)’이라는 에어리퀴드의 윤리위원회를 알게 됐다. 세이프 콜은 회사 내에서 일어나는 괴롭힘, 차별, 부정부패 등을 본사에 신고하는 일종의 신문고 제도다. 그는 세이프 콜을 통해 3번 탄원서를 제출했다. 하지만 단 한 차례도 본사로부터 답변을 받지 못했다. 그는 본사가 지사에 답변을 보냈을 것으로 추측했다.
“저랑 법적으로 싸우고 있는데 본사가 (한국 지사) 인사 상무한테 답변을 주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가해자한테 사건을 조사하라는 것과 똑같은 거죠. 문제가 생기면 본사에서 직접 개입해서 조사해야 해요.”
그는 회사를 상대로 손해 배상, 서울노동위원회를 상대로 행정소송 등 총 3건의 소송을 진행 중이다. 자신과 비슷한 괴롭힘을 당한 동료 피해자들이 법정에서 증언도 서주고, 진술서도 써줬다고 그간의 경과를 전했다.
“절대로 중간에 포기할 생각이 없어요. 이건 저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에요. 이런 식으로 회사를 나간 사람들이 꽤 많아요.”
직장 내 괴롭힘을 당한 후 그의 일상은 무너졌다. 그는 공황장애와 급성 스트레스 장애 등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 약 없이는 잠을 잘 수 없다. 약 기운 때문에 운전대를 잡을 수도 없다. 사람 많은 공간에서 답답함을 느껴, 지하철과 버스 등 대중교통도 탈 수 없게 됐다. 멀지 않은 거리를 택시로 이동하는 것만 가능하다. 엘리베이터도 타기 힘들어 계단으로 오르내린다.
“항불안제를 먹으면 발을 땅에 디딜 때 걷는 게 아니라 구름을 걸어가는 것 같아요. 계단을 내려가고 올라갈 때 넘어질까 봐 불안해요”
“저는 다 잃었어요. 이제 아무 곳도 못 갑니다. 어느 회사도 저를 쓰려하지 않아요. 심장마비로 쓰러진 경력도 있고, 회사와 소송 중인 사람이에요. 아무리 제가 인맥이 좋고 실력이 좋다 해도 누가 저를 쓰겠습니다”
망연자실한 그의 모습에 순간 정적이 흘렀다.
“저는 보상은 중요치 않습니다. 회사한테 사과를 받고 싶어요. 관련자는 반드시 징계를 받아야 하고요. 그래도 아마 병은 나을 것 같지가 않아요. 기억이라는 건 사라지지 않으니까...”
그는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떨궜다.
직장 내 괴롭힘은 해고나 퇴사로 끝나는 직장생활의 문제가 아니었다. 직장 조직 속에서 자행되는 인격살인에 가까운 ‘범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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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의소리 기획
직장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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